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공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인터넷전문은행들의 시계는 오히려 빨라지고 있다. 케이·카카오·토스뱅크는 향후 법제화 이후 열릴 디지털 금융시장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차세대 격전지로 낙점하고 기술 검증과 글로벌 동맹 구축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9일 금융권에 따르면 디지털자산기본법(가상자산법 2단계)은 중동 지정학적 위기와 당국·정치권 간 쟁점(발행 주체 및 대주주 규제)에 부딪혀 연내 통과가 불투명한 상태다. 당초 정부는 올 1분기 내 입법을 추진했으나 세부 조율에 난항을 겪으며 지연됐다. 다만 국회 정무위가 오는 15일 법안심사 소위를 열고 관련 논의를 재개하기로 하면서 제도화 움직임에 다시 불이 붙을지 주목된다.
이 같은 입법 공백 속에서도 인터넷은행업계는 선제적 인프라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다. 법제와 감독 구조가 본격적으로 정비된 이후 시장에 진입할 가능성이 큰 만큼, 기술·협력·인프라 측면에서 선제적으로 기반을 미리 다져놓겠다는 포석이다.
인뱅 중에서 스테이블코인과 관련해 가장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실행력을 보이고 있는 곳은 케이뱅크다. 케이뱅크는 해외 금융사 및 디지털자산 전문 기업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스테이블 코인의 송금‧결제 네트워크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한국‧일본 기업과 스테이블코인 기반 해외송금을 기술검증하는 ‘팍스 프로젝트’ 1단계 테스트를 완료했다. 한국에서 원화를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해 블록체인으로 송금한 뒤, 일본에서 이를 엔화로 환전하는 방식으로 검증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스테이블코인 기반 송금이 기존 해외송금 대비 속도와 비용 측면에서 효율성이 크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케이뱅크는 아랍에미리트(UAE), 태국 등과 스테이블코인 기반 해외‧송금결제 인프라 구축을 위한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UAE 현지기업 ‘체인저’, 국내 블록체인 기업 ‘비피엠지’와 업무협약을 맺고 한국과 UAE를 연결하는 차세대 송금 및 결제망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2월에는 태국 카시콘은행과 협력해 해외 송금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케이뱅크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면 해외 송금 분야에서 수요가 클 것이라고 판단해 해외 주요국 및 기업들과 협업을 강화하고 있으며, 법제화에 대비해 착실하게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카카오뱅크 역시 제도적 기반이 갖춰질 것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카카오뱅크는 카카오 그룹 차원의 연계 전략을 통해 시장 주도권 확보를 노리고 있다. 카카오, 카카오페이와 함께 ‘스테이블코인 태스크포스(TF)’를 결성해 은행, 결제, 플랫폼을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에서 사업 방향성을 검토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금융 규제 대응과 계좌 기반 신뢰 인프라 구축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계획이다.
윤호영 카카오뱅크 대표는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페어몬트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추후 가상자산 관련 법이 제정되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필요한 라이센스가 생길 가능성이 큰 만큼 이를 준비해 나가겠다”며 “발행된 코인들이 실질적으로 통장과 연계돼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밝혔다.
반면 토스뱅크는 내부 워킹그룹을 통해 기술 및 규제 흐름을 분석하며 신중을 기하고 있다. 토스뱅크 관계자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상표권 출원과 내부적인 트렌드 분석 등을 통해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권에서는 인뱅 3사의 이 같은 행보가 예대마진 중심의 수익 구조를 넘어 디지털 플랫폼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승부수라고 보고 있다. 결국 향후 입법 방향에 따라 누가 먼저 실효성 있는 디지털 화폐 생태계를 구축하느냐가 핵심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